어른-아이
나무 한 그루를 생물학적으로도 볼 수 있고,
물리학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볼 수 있으며,
건축학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미술적으로도, 문학적으로도 볼 수 있다.
문학을 업으로 하다보니 나는
나무 한 그루조차도 문학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한겨울을 이기며 서 있는
꿋꿋한 전나무를 ‘우정’과 비슷하다고 여긴 적이 있다.
여기까지는 나쁜 게 아니지만
현실적인 판단이 요구되는 정황에서도
문학적으로만 대상을 보고 판단한다면 문제가 된다.
예술은 미(美)를 추구하고, 미는 조화를 중시한다.
그러나 미와 조화는 이상에 속하는 ‘꿈’이다.
가혹한 현실은 나에게 미와 조화라는 꿈을 뒤로 미루고
‘나’와 ‘나의 것’이라는 현실을 먼저 챙겨야 한다고 말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미와 조화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나’와 ‘나의 것’이 삶의 앞 무대로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이가 든 사람이 잘 웃지 않고
감동할 줄 모르는 것은 현실이 가혹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잘 웃고
싱싱한 기운에 넘쳐 잘 감동하는 것은
미와 조화의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어른인가, 아이인가.
나는 지금 어른아이인가, 어른어른인가.
집 앞 작은 공원을 산책하던 중
푸른 잎사귀가 흔들리는 나무 곁을 무심코 지나치지 않는,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싱싱한 초록빛 잔물결을 조용히 응시할 줄 아는,
그에 감동할 줄 아는, 그럼으로써 삶의 진수(眞髓)로 들어가는,
그 ‘잠시잠깐’ 동안 우리는 어른이면서도 동시에 아이이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어른은 다시 아이가 되어야 한다.
삶은 세 번째 차원에 이른 사람,
어른아이에게 가장 아름답다. 가장 조화롭다.













